쓰다보니 데이모스님과 까를로스군을(이름만;) 출연시키게 되었습니다.
슬퍼함이 도가 지나친 까를로스. 아무리 그래도 선장님을... (그러고 보니 내가 그렇게 썼군;;)
처음 부분을 보시면 아밀카르의 솔로들에 대한 염장질로 보이지만
뒤에는 전혀 안 그렇답니다.
(그렇지만 호러물도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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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언제 세상에게 인사를 할까.
어떤 분들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가 태어날 때' 그리고 '너가 죽을 때'
...
그러나 내가 인사를 했을 때-
세상은 이미 죽어 있었다. 】
해도 저물고 번화한 리스본의 광장에도 점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때,
머리부터 발 끝까지 푹 망토를 뒤집어쓰고 교회로 바삐 발걸음을 놀리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두건의 그늘로 인해 어둡게 물들어 있었으나 그의
표정은 그에 관계없이 밝기만 했다.
"루비나, 조금만 기다려."
인도까지 열린 뱃길로 인한 후추 무역, 나라간의 치열한 해상 권력전,
바다를 향한 뱃사람들의 로망이 불타는 시대도 아밀카르에게는 남 이야
기 같은 일일 뿐이었다. 물론 그도 어렸을 때 배를 타고 먼 미지의 대륙
과 섬으로 떠나는 것에 막연한 환상을 품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자신과 평생을 함께할 루비나와의 만남은 평생 어부로 살아갈
것을 불평하던 자신을 바꾸어 놓았다. 바다를 향한 낭만쯤 어떠랴, 사랑
하는 이와 살 수 있다면.
단조로운 삶을 못견딘 그의 선배 까를로스는 수습 어부의 일을 차고나
가 여필상단의 뱃사람이 되었다. 그는 가끔 리스본에 들러 온갖 종류의
모험담을 늘어놓긴 하지만, 그래보았자 무엇하랴.
아밀카르가 상상 속에서나 만나는 이슬람 국가들과 아프리카 남쪽 끝까지
가봤다고 열심히 떠드는 까를로스지만 노총각으로 늙어가고 있다는 것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데.
아밀카르는 혼자서 쿡쿡 웃다가 품 속에 들은 향수병을 만지작거려 보
았다. 까를로스의 깨져 버린 연애에 대한 신세한탄과 자신들을 착취한다
는 선장에 대한 갖은 악담(상당히 순화시킨 표현). 그 것을 겨우겨우 참
고 들어준 대가로 얻은 물건이었다.
남의 넋두리를 듣는 일은 정말 지겨워. 특히 까를로스 형의 선장, 데이
모스라고 했던가? 그 사람은 정말 오래오래 살 거라고 나 아밀카르가 공
언한다. 오늘 까를로스 형에게 먹은 욕이 양도 많은데다 다채롭기 그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눈물나올 정도로 지루한 시간 끝에 오는 대가는 짭짤하
기 그지없다. 자신의 몸에 뿌린 향수가 오늘 하루 종일 정어리를 써느라
배어버린 생선 비린내를 가려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병은 사랑하
는 루비나에게.
그는 루비나를 만나러 교회에 가고 있었다. 행여나 광장을 지나다 짖궂
은 선배들에게 먼저 소문나는 것은 바라지 않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망
토를 뒤집어 쓴 차림이었다.
오늘, 나 아밀카르는 루비나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사랑스런 아이들도 많이 낳고...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끝도 없는 공상에 빠져있던 아밀카르는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흠칫
고개를 들었다. 수도의를 입은 누군가가 육중한 교회문을 밀고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구름 속에서 드러난 달 때문에 그 사람의 얼굴이
아밀카르에게 한 눈에 들어왔다.
아밀카르는 멍청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교회문을 밀고 밖으로 나오
는 어떤 남자. 이상하게 그 모습은 주변 풍경과 다르게 상당히 이질적이
었다. 길다랗게 내려온 치렁한 은발에 녹색의 눈동자와 붉은 수도의.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교회의 안이 온통 암흑이라는 사실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교회의 불이 모두 꺼질리는 없는데... 신부님께서 어
디 가셨나?'
그리고 아밀카르가 교회 문 틈 안에서 시선을 때었을 때, 그 남자는 이
미 사라지고 없었다.
묘하게 이상해지는 기분을 다잡으며 아밀카르는 교회 앞으로 다가갔다.
루비나는 아직 오지 않은 걸까?
교회 안은 온통 정적과 암흑 뿐이었다. 예배당 문 앞 뒹구는 자그마한
램프가 교회 안에 있는 불빛의 전부였다. 아밀카르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기분을 램프를 주워들고 예배당 안을 둘러보았다.
"신부님! 아무도 안 계세요? 루비나! 여기 없어?"
아밀카르의 목소리가 넓은 예배당 안에 웅웅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단지 그의 외침이 사그러들 때 무언가가
계속 똑똑 떨어지는 듯한 소리만이 그의 말에 답했다. 아밀카르가 극도
로 긴장했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던 소리였다.
의아해하던 아밀카르는 들고 있던 램프를 좀더 높이 치겨들었다. 그러
자 아까 기둥의 그늘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단상 구석에 누군가가 엎
드려 기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계속해서 무언가가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신부님? 신부님이시죠! 여기서 뭐하시는......"
아밀카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신부의 목에는 단검이 박혀 있었고 그 곳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규
칙적으로 떨어지면서 똑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완전히 충격으로 굳어버린 아밀카르는 용케 들고 있던 램프도 떨어뜨리
지 않고 있다가 죽은 신부의 손가락에 걸려있던 리본 조각을 볼 수 있었
다. 그 것은 그가 루비나를 생각하는 것을 볼 때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
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리본은 아밀카르가 까를로스에게 협박하고 조르
다시피하여 얻어내 루비나에게 선물한 모자에 매달려 있던 것이었다.
아밀카르는 서서히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품 속
에 있던 향수병이 빠져나와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비현
실적으로 느껴졌다.
"루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