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암스테르담.
유럽에서 네덜란드만큼 기구한 땅도 없을 것이다. 로마가 패망한 이후, 프랑크 왕국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리는 합스부르크 왕국의 땅으로 넘어가고, 왕이 바뀌면서 오스트리아에서 스페인으로 주인이 바뀌는 땅. 하지만 네덜란드인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워낙 강대국이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의 선구자인 포르투칼마저 스페인에게 종속되어가는 지금, 유럽에서 합스부르크가에 맞서는 건 프랑스뿐이었다. 작은 네덜란드인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런 지금, 네덜란드에 독립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암스테르담 부두에는 한산했다. 심심치 않게 부두에 정박해 행패를 부리는 스페인 해군도 이제는 무덤덤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중에 더운 날씨에도 열띤 작업을 하고 있는 배가 보였다. 거대한 카락 한 척에서 수많은 교역품이 내려지고 있었다. 카락의 옆구리에는 오케아노스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돛대 끝에는 그리스식 투구가 그려진 깃발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배를 등지고 시내로 들어가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꼬마라고 생각될 정도로 작은 키를 가진 여자, 보라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전형적인 라틴인이었다. 금발이 출렁이는 북유럽에서 보라색 생머리는 단연 눈에 띄었다. 하지만 차가운 그녀의 눈빛은 작은 키에도 사람들을 충분히 움츠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남자는 조금 달랐다. 역시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노란색에 가까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키도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코도 안 보일 정도로 낮았다. 가끔씩 나타나는 중국인이나 요즘 포르투칼과 교역을 시작했다는 지팡구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둘 다 키가 작은 탓에 묘하게 둘은 어울렸다. 먼 거리에서 보면 보통 유럽남녀가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조용하게 걸어가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을 걸었다.
“이제 함부르크와의 무역도 흑자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한자동맹에 투자해 왔던 게 이제야 득을 보는 거지. 스페인에게 그걸 판다는 게 좀 기분 나쁘지만. 그리고 알카디우스. 그런 거 다 보고할 필요 없어. 어차피 회계는 자네가 다 맡았으니까.”
차가운 얼굴 속에 나타난 약간의 미소. 알카디우스도 웃으면서 답했다.
“네. 에이레네님.”
검은 눈동자를 보면 생각하기 힘들 완벽한 네덜란드어였다.
“자, 그럼 상회로 돌아가자. 너무 오래 비워뒀던 것 같으니까.”
에이레네는 알카디우스보다 빠르게 발길을 옮겼고, 알카디우스는 자기보다 작은 그녀를 따라가느라 발걸음을 빨리 했다. 남이 보면 웃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 때, 광장에서 거대한 외침이 들렸다.
“스페인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빼앗았는가?”
에이레네와 알카디우스가 간 곳에는 한 건장한 남자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주위에 그를 호위하는 부하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모여 있었다.
“우리의 집과 우리의 재산! 우리의 배! 그래. 빼앗긴 게 너무도 많다. 하지만 빼앗긴 건 그게 아니다. 우리가 진정 빼앗긴 것은!”
남자의 연설은 귀를 때릴 정도로 컸다. 처음에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도 조금씩 눈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우리의 혼이다! 그 옛날 로마제국 시절부터 침략을 받았음에도 잃지 않았던 우리의 혼! 이제까지 네덜란드의 지배자들도 뺏지 않았던 혼! 그걸 지금 그들은 뺏고 있다!”
“용감한 남자군.”
“빨리 이 자리를 떠야 될 거 같습니다.”
알카디우스가 항구를 가리켰다. 스페인 군함 한 척이 입항하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절정일텐데, 아쉽군.”
어디선가 스페인군이 나타났다는 외침이 퍼졌다. 동시에 연설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설을 하던 남자는 싸우자고 마구 소리를 질러댔지만 도망가는 사람들에게 그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단상에서 그를 호위하던 병사들도 이리저리 허둥댔다.
알카디우스도 피하자고 했지만, 에이레네는 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단상의 남자가 어떻게 할지 궁금해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역시 도망갈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본 그의 부하들도 각자의 무기를 움켜잡았다.
그 때, 어떤 남자가 급히 단상에 올라오더니 사람들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들의 대화가 에이레네의 귀에까지 들렸다.
“호른! 자네가 피하지 않으면 독립운동은 누가 끌고 가려고 그래? 지금은 맞서는 게 능사가 아니야!”
“프레드릭,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가슴을 펴고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어렵다고.”
그렇게 말하며 호른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스페인 군함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를 프레드릭이 다그쳤다.
“그럼 내가 누누이 한 말도 기억할텐데? 죽을 용기보단 살 용기를 가지는 게 더 어렵다고! 빨리 도망쳐! 녀석들은 이제 항구에 들어왔다고!
호른은 그런 프레드릭을 보면서 잠시 생각하더니 얼굴을 숙였다.
“알겠다. 오늘은 잠시 피하도록 하지. 나중에 보세. 프레드릭.”
호른과 그 부하들이 도망가는 건 신속했다. 허둥지둥 도망가는 게 아닌 질서정연한 모습에 그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스페인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연단 주위에 사람들이 다 없어진 다음이었다. 화가 난 스페인 병사들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심문하기 시작했다. 아직 몸을 피하지 못한 프레드릭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서 사람들을 선동한 자가 어디로 갔지?”
병사가 창을 들이대며 물었다. 날카로운 창이 프레드릭의 턱 언저리까지 닿았다.
“아까 항구 쪽으로 도망가던데.”
천연덕스러운 말. 병사는 어이없어했다.
“이봐! 우리가 온 곳이 항구라고! 감히 대스페인군을 속일려고 해?
“글쎄.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프레드릭의 대답. 아까 비장했던 얼굴은 어느새 기생오래비 같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당황한 병사가 상관에게 보고하자, 프레드릭을 중심으로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부하의 보고를 받은 자가 프레드릭에게 칼을 겨눴다. 레이피어의 끝이 음산하게 프레드릭의 옷을 찔렀다.
“나는 대스페인제국의 이네스다. 네 이름이라면 들어본 적 있지. 감히 네덜란드 독립군에게 물자를 원조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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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몰아서 올리려다가 너무 길어서 두 개로 나누어서 올립니다. 네덜란드 이벤트가 좀 길거든요 orz; 하긴 영국 이벤트에서도 프레데릭 나오는 부분이랑 잔치하는 부분 빼버렸지만... 네덜란드 이벤트에서도 호른이랑 주점에서 얘기하는 부분 뻇습니다. 두 주인공이서 번갈아서 하니까 이벤트와는 꽤 다를 거예요. 뭐 진행은 똑같겠지만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