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를로스 형.
왜?
나 배를 탔어. 그리고 먼 곳으로... 먼 곳으로 간다......
뭐? 한 곳에 박혀서 오래오래 길게길게 살자는 게 신조인 네 놈이, 배를 타?
...
형, 우리 하나만 약속하자.
나 빨리 가야해. 늦으면 선장님한테 혼난단 말이다.
하나만 약속하고 가. 다음에 꼭 살아서 만나자.
뭐?
어느 쪽도 죽지말고, 다시 살아서 만난다고 약속해. 】
교회 뒷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온 아밀카르는 미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어떤 인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달빛도 없는 어둠에 싸인 음산한 교회의 모습이 더더욱 무겁게 그런 그를
짓눌렀다.
아밀카르가 교회벽을 빙돌아 광장 쪽의 앞문으로 가려고 할 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런 그를
고꾸라뜨렸다. 그러나 신경이 곤두설대로 곤두선 아밀카르 또한 그런 기척을 이미 느끼고 있
었다. 아밀카르는 쓰러지면서도 자신을 민 자의 옷자락을 있는 힘을 다해 움켜잡았다. 옷자락
이 부우욱 소리를 내며 찢겼고 둘은 서로 엉키며 그만 같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 순간 불
이 번쩍하는 것 같은 충격이 아밀카르를 강타했다. 하필이면 쓰러지면서 돌바닥에 이마를 들이
박은 듯 했다.
"쯧쯧, 너도 정말 한 물갔군. 그런 것도 기습이라고 하는 거냐, 페드?"
뒤 쪽에서 거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니었다니. 어둠에 암적응 되었음에도 불
구하고 아밀카르는 눈 앞이 캄캄해지는 듯 했다. 이마가 얼얼하면서 눈 앞이 가물거렸지만, 지금
멍청하게 정신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밀카르는 자신에게 엉켜있던 자를 급히 뒤로 밀
어뜨리면서 억지로 눈을 떴다. 의외로 자신에게 엉킨 페드라는 이름의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왜소한 체구를 한 소년이었다. 먼저 이 녀석을 어떻게 한 다음에.
"아악!"
그러나 반쯤 몸을 일으키려던 아밀카르의 얼굴에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빛줄기가 작렬했
다. 그 틈에 아밀카르는 페드라고 불린 소년에게 강하게 정강이를 걷어차이고 다시 바닥에 고꾸라
져야 했다. 멀리 교회 앞 광장 쪽이 갑자기 시끄러운 사람 소리로 가득 차고 있었다. 얼굴에 쏘여
지는 빛줄기를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아밀카르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너네가 신부님을 죽인거냐? 루비나는 어떻게 한 거야! 설마... 루비나도?"
"루비나? 아, 아까 교회 앞문에서 어슬렁거리던 갈색 머리에 눈 큰 여자? 그 낡아빠진 옷에 어울
리지 않는 모자를 쓰고 있던?"
여자의 말에 아밀카르는 이제까지 쌓여 왔던 불안감이 한순간에 폭팔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한거야! 루비나를 어떻게 했냐고!"
사람 소리가 점점 커지고 가까워졌다. 중무장한 갑옷이 부딪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정체모를 여
자와 소년, 아밀카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빛을 발하는 구체를 집어넣었다.
"손발 안맞는군. 가자, 페드."
"기다려!"
하지만 너무 강렬한 빛을 받아버린 아밀카르의 눈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자신을 엄습하던 강
렬한 빛이 사라지자 아밀카르는 마치 자신이 장님이 되어버린 것처럼 눈 앞에 암흑만 깔려 있을 뿐,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정신 없이 눈을 깜박거리고 문지르던 아밀카르가 시야를 회복하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가 겨우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중무장한 병사
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밀카르가 가끔 귀족가 저택에 생선 배달을 갈 때나 먼발치에서 보았던
왕궁 병사들이었다. 그들의 창끝이 지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네놈을 신부 살해범으로 체포한다. 끌고가!"
그리고 갑자기 뒤에서 격렬한 폭파음이 그들을 강타했다. 아밀카르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교회 지붕이 불타고 있었다.
"루비나... 루비나...... 젠장!"
아밀카르는 미친 듯이 철창을 쥐고 흔들었으나 그런다고 감옥의 철창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은 불안과 초조로 뒤범벅되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신부의 사체를 보았을 때, 이미 아밀카르는 본능적으로 이 교회에서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그 곳에서 우물쭈물하다가는 어떤 사건에 휘말릴 지 몰랐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는 곳으로 루비나를 불러낸 것은 자신이었다. 그리고 루비나가 왔던 흔적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루비나가 어떻게 되었을 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교회 주변을 헤맸고, 이렇게 뭔지
도 모를 이상한 사건에 보기좋게 휘말려 들어 왕성 지하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철창을 미친듯이 잡아 흔들고, 그 좁은 감옥 안이 웅웅 진동할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바닥에 얼굴
을 박는 등 소위 발광을 한 끝에 아밀카르는 사람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자신이 왜 이런 처지
가 되었느냐하는 합리적인 설명을 해 줄 자가 아니라, 엄청난 몽둥이 세례를 퍼부을 간수들.
게다가 그들이 하는 말 또한 기막힌 것이었다.
"벌레 같은 놈, 감히 하잘 것 없는 평민 주제에 귀족 부인과 사통을 해? 정말 간도 크구나!"
"아, 아니... 저기 난......"
오늘 밤은 아무래도 아밀카르에게 세상이 미쳐서 돌아가는 날인 듯 했다. 아밀카르가 듣기에 어이
없는 헛소리를 하던 간수들은 그렇게 그가 무슨 소리를 하든 막무가내로 몽둥이질을 했다. 마치, 그
의 말이 들리지 않도록 귀를 막아버린 사람들 같았다. 아밀카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
가 되자 매질을 그친 간수들은 그를 내팽개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간수들이 소리를 낮춰서 투덜거리
는 말들이 정신을 잃을 듯 말듯 한 아밀카르에게 희미하게 들려왔다.
"밤에 갑자기 집합하게 하더니 이게 무슨 난리래..."
"야. 그런데 사통이 뭐냐, 좀 그럴 듯한 다른 죄명은 없었냐?"
"무슨 상관이야... 어쨋든 윗분들은 아무 이유나 붙여서 가둬 두라는데......"
"저 놈이 발광하는 것도 이해가 돼. 하지만 어쩌겠냐? 재수 더럽게 없는 셈 쳐야지."
재수 더럽게 없는 셈이라... 아밀카르는 자신의 터진 입술 사이로 킥킥리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것은 웃음 아닌 비어버린 웃음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 간수들은 아밀카르의 터져버릴 듯한 머리를 잠시 식혀주었다. 신부를 정말 죽였느
냐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신이 이 곳에 와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아밀카르는 잠시 텅 빈 머리로
차가운 감옥 바닥에 맥없이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초조와 불안 끝의 분노가 무력감으로 변하고 몸의 힘도 빠지자, 이제는 죄책감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건 당시의 주변 정황에 대한 의문과 상념이 꼬리를 물고 그의 머리 속으로 올라왔
다.
'루비나는 나보다 먼저 교회에 왔었고 신부를 만난 게 분명해... 그렇다면 루비나는 어디로 가고, 신
부를 죽인 것은 대체 누굴까? 아까 마주쳤던 그 자들... 루비나를 알고 있었어......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체포해 간 병사들......'
눈 앞에서 불에 일렁거리는 교회가 어른어른 거렸다. 목에 칼이 꽂힌 신부가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헌금...' 얼굴 모를 그림자들이 일어서서 목이 긁혀서 내는 듯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붉은 수도의
를 입은 남자가 어딘가로 뛰어갔다.
갑자기 아밀카르의 눈 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땅에 모자의 리본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루비나가
그 앞에서 웃었다.
"루비나......"
나 때문이야. 내가 교회로 불러내지만 않았어도. 휘말리는 것은 자신만으로 끝내야한다고 생각했다.
차가운 잠은 빠르게 찾아왔다.
아밀카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바다 냄새가 코 끝을 간지
럽혔다. 희미하게 뜬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히 새벽의 머루빛 하늘과 바람에 펄럭이는 돛이었다. 아
밀카르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었다.
"이제는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하늘의 색깔이 바뀌고 있었다. 수평선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붉은 기운이 조금씩 뻗어올라
온다.
수습 어부일로 새벽부터 나가서 고기를 잡느라 바다의 해돋이 쯤은 어릴 적부터 숱하게 봐왔던 그였
다. 그러나 그 날 새벽은 아밀카르가 여태까지 겪어본 세월 중에서 정말로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한줌의 새벽빛을 느꼈던, 그 때부터 아밀카르는 3년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중에 그의 죄
가 에스파냐군의 중요 기밀을 훔쳐서 달아난 첩자로 되어 있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는 담담했다. 아
밀카르는 이제 설령 수십 명을 살해한 연쇄 살인범으로 죄목이 바뀌어져 있어도 놀라지 않을 것이기 때
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