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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밝았다. 늘 나소의 오전은 조용하다. 밤 늦게까지 럼을 마시고 해적의 삶을 즐기느라 녹초가
된 이들은 저마다 어둠을 찾아들어가 숙면을 청하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듯 고요한 나소의 모습은
낯설기까지했다.
━두극, 두극.
발소리가 점차 커진다. 썩은 나무바닥을 딫는 그 걸음소리에 감고 있는 저지의 눈이 뜨였다.
「…누구냐.」
먼저 입을 연건 ‘저지’였다. 정적에 어울리는 그의 잠긴 목소리가 해를 등진 검은 인영을 향해 물었다.
잠시뒤, 검은 인영이 보다 낮은 목소리로 그의 물음에 간결히 답하였다.
「‘에단 테일러’. 오늘이 접선일이오.」
해적 복장을 한 그는 산타메의 선원이였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는 저지를 “선장” 이 아닌, “에단 테
일러”, 그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군.」
「난 먼저가 주인을 알연할테니 해가 지기 전까지 접선지로 오도록 하시오.」
남자는 말을 마친뒤 지체없이 몸을 돌려 주점을 빠져나갔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에단은 누
웠던 몸을 서서히 일으키며 기지개를 폈다. 한동안 놀고 마셨으니, 다시 일을 하러 가야할 때였다. 에
단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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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플레이트 아머에 모리온 헬름을 쓴 근위병 한무리가 도시 외진곳의 지하창고를 급습했다. 문을 발로
박차고 신속하게 안으로 진입하는게 상당히 훈련이 잘된모습이였다. 군인들은 스피어를 들고 캄캄한
어둠속을 응시한다.
━터벅, 터벅.
잠시후, 갑옷과 투구가 아닌 지위높은 군복에 깃털 장식을 한 삼각 모자를 쓴 한 젊은 군인이 그 자리
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너뜨린 낡은 나무문을 딫고 서서히 캄캄한 지하창고 내부로 발을 들이는 젊은
군인은 아주 세심한 동작 하나하나에마저 절도와 숨죽인 패기가 묻어났고 어둠을 향하는 발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 ….」
짙은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그는 하얀 피부에 갸름한 턱선과 곧은 콧대까지 무엇하나 빠짐없는 미
남이였다. 하지만 그를 더욱 인상깊게 하는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매섭게 응시하는 그의
예리한 시선이였다.
한동안 어둠을 주시하던 그는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더니 어둠속을 향해쐈다. “탕!” 하는 총성이 아무
도 쓰지않는 낡은 지하창고의 정적을깨고 일순간 어둠을 밝힘도 잠시. 겨눈 총구의 연기가 서서히 사
라질 무렵, 곁에 서있던 중년의 강직한 인상의 군인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기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찾고 있던 것일까. 자신보다 나이가 분명히 많아 보이는 능숙한 중년 군인의 말소리에
도 불구하고 총을 쏜 젊은 군인은 듣는 기척 조차 않했다. 그 모습이 어찌보면 몹시 무례해보일 수 있
겠지만, 그의 지위로 보자면 이상할것이 하나 없는 상황이였다.
「…철수한다.」
그뒤로도 한동안 어둠을 응시하던 젊은 군인은 결국 미련을 거둬내고 훽하니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
의 명령이 떨어지자 창 끝을 어둠으로 겨누고 있던 군인들 전원이 지하창고의 음지에서 철수했다. 남
은건 젊은 군인과 조금전 말문을 열었던 중년 군인.
「‘클라우스’ 경. 놈들이 도시와 이렇게 인접한곳에 은닉해 있을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명령받은 수색
일을 이미 이틀 전에 초과했습니다. 더이상 세비야에 잔류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그만 ‘발렌시
아’ 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중년 군인은 굵직한 목소리로 젊은 군인 ‘클라우스’ 에게 말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이만 세비야에서
철수하기를 바라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대답없이 어둠을 응시할뿐이였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중년 군인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아니. 놈들은 분명히 이 근처에있다. ‘아고스’ 부대장. 발렌시아로 서간을 보내라. 며칠더 세비야 주
위를 수색하겠다고.」
「허나…」
「자네들은 내 부하로서 세비야에 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하는군. 명령이다.」
중년군인의 이름은 ‘아고스’. 그는 재차 항변하려고 하였으나 클라우스의 강직한눈매에 결국 경례를
하고 돌아섰다. 아고스 마저 떠나간 자리에는 클라우스 홀로남았다. 이 젊은군인은 자신의 생각이 옳
음을 믿으며 그 어둠을 곱씹었다.
「…분명히 이곳에 있다. 이곳 ‘세비야’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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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가 복장을 바로한다. 그래봤자 남루하고 허름한 차림새에 큰 변화가 오는건 아니였지만, 옷매무
새를 바로하고 식탁 위에 대충 널어놨던 자신의 총이며 칼 등을 허리춤에 잘 찬뒤 마지막으로 삼각모
자를 쓰고 주점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였다.
「‘접선지’ 로 가는건가?」
그때였다. 어느 한곳에서 들려오는 그 여인의 음성에 저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
을 지었다. 가던 걸음을 멈춘 그는 서서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 있던건 이곳 나
소의 유일한 여자 ‘리지 블랙’ 이였다.
「…하하… 자는줄 알았는데…」
「도둑 고양이처럼 어딜 그렇게 살금살금 기어나가지.」
「도둑 고양이라니?」
「시치미 떼지마, 저지.」
그녀는 단호하게 저지의 말머리를 끊었다. 주점 안의 모두가 자는줄 알았건만 역시 그녀는 보통내기
가 아니였다. 자신의 방심을 속으로 탓 하면서도 서서히 다가오는 리지의 모습을 흔들림 없이 바라보
던 저지는 어느덧 자신의 바로 앞에 멈춰선 그녀를 맡이했다.
「…너와 난 ‘동업자’ 임을 잊지마. 네놈이 무슨 꼼수를 부려 나를 물먹이려는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질없는 짓이란걸 명심해.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네 거래는 내 거래야. 난 내 거래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아주 싫어하지.」
고혹하게 저지를 압박하던 목소리가 그치고 그녀가 먼저 주점을 빠져나가자 저지는 멍하니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봤다. 그도 잠시, 리지가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리며,
「‘접선지’ 는 어디지? 꾸물대지말고 앞장서.」
라고 서있는 저지를 재촉하자 그또한 서서히 주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지가 앞서고, 제법 거리를
둔채 저지가 뒤따른다. 둘의 위치는 달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하지만 나소의 항구로 향하는 둘의 모
습을 지켜보는 눈또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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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뒷편에 숨어 둘의 행보를 지켜보던 한 해적이 이윽고 둘이 항구 방향으로 향하는걸 파악하자 다
급히 몸을 돌려 나소의 중심부로 향한다. 이 넓지 않은 나소는 패거리 별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었는데
나소의 중심부는 바로 ‘검은수염’ 에드워드 티치와 그 패거리의 구역이였다.
발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중심부로 향한 해적은 곧장 정신이 있는 동료 해적을 부르며 “선장” 의 소재
를 물었다. 중심부의 주점 안에 자고있다는 티치의 소재를 파악한 해적은 다시금 걸음을 재촉하였다.
「선장! 선장!」
다급하면서도 높은 목소리에 조용하던 주점 안이 부산해진다. 그 목소리에 깬듯 여기저기서 끙얼거리
는 소리와 작은 욕지꺼리가 동반되었다. 잠시후, 어둠 속에서 거대한 인영이 흔들린다. 누워있던 몸을
반쯤 일으키자 이미 여느 남성 허리까지 오는 장신 이였다. 하지만 거기서 더이상 일어섬 없이 잠시후
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냐.」
「저, 저지와 리지가 단둘이 항구로 향하고 있어요!」
━ !
그때였다. 그 소리를 듣기 무섭게 티치가 몸을 일으킨다. 거대한 장신이 한순간에 일어서자 그것을 지
켜보던 모두가 침을 삼킨다. 어둠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티치의 안광이 커져 있음을 알아챈 해적은 곧
이어 그의 불호령같은 목소리를 감당해야했다.
「저지와 ‘리지 블랙’ 이… 단둘이!!」
한없이 그의표정이 일그러졌다. 나소에 떠도는 소문만으로도 괴로워 죽겠는데 결국 자신의 귀로 직접
소식을 접하게 되자 티치는 하늘이 무너지는것 같았다. 어느덧 주점안의 모두는 잠에 깨 그 긴장 하면
서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고, 다른 패거리들 또한 좁은 주점 입구에 저마다 고개를 들이 넣고 상황
을 구경하고 있었다.
「…리지… 리지가 결국… 저지… 그놈이랑…」
사나이 가슴에 눈물이 흐르는 순간이였다. 그토록 흠모하던 검은수염의 이상이였던 ‘리지 블랙’ 이 그
토록 혐오하던 ‘저지’ 와 그렇고 그런 사이 였다니….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티치는 그야말로
넋을 잃은 모습이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갑작스레 티치가 앞의 부하들을 밀치고 성큼성큼 주점 밖으
로 향했다.
「우오오!」
입구를 가득 메운 부하들이 저마다 소리내며 티치의 길을 터주었고 그는 갑작스레 항구로 달리기 시작
했다. 저리 험악하고 악명높으면서도 의외로 순정파였던 티치가 돈과 명예가 아닌 사랑을 위해 도약하
자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부하들 또한 뒤따라 달리기 시작하였다.
나소에서 가장 규모 큰 ‘검은 수염’의 패거리가 모두 나소를 가로질러 달리는 퍼레이드는 결국 그것을
우연찮게라도 본 다른 해적들까지 동참하게 함으로서 나소 전체의 물결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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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선장! 저길 보세요!」
어느덧 항구에 도착했으나, 리지와 저지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티치에게 한
해적이 손끝으로 수평선을 가리킨다. 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저 멀리로 ‘리지’ 와
‘저지’ 로 추정되는 두 인연을 실은 작은 쪽배가 보였다.
「크으아!」
티치가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 괴물의 포효에 주위에 있던 모두가 섬칫 놀랐다. 붉게 상기될때
로 상기된 티치의 얼굴은 성난 맹수 같았고, 그의 이마켠에는 굵고 푸른 핏줄들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
었다. 안절부절해하며 좌우로 고개를 젓던 티치가 결국 그 자리에서 명령을 내린다.
「모두 배에 올라라! 저 둘을 쫓는다! 당장 움직여, 이놈들아!」
「예… 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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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노를 젓던 저지가 리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나소의 풍경이 사뭇 달라졌음을 깨닫는다. 그의 시선을
느낀 리지가 의아해 하며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리니 과연, 나소의 항구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서서히 커지는 동공이 다시 저지를 향하였다.
「뭐…뭐지?」
「…나소의 해적은 다 모인것 같군….」
「그러니깐, 저놈들이 왜 모인거냐고!」
그 순간, 검은 해적의 배 ‘앤 여왕의 복수(Queen Anne's Revenge)’ 호의 돛이 펴졌다.
「티치!」
리지와 저지 둘다 ‘앤 여왕의 복수’ 호가 서서히 물살을 가르는 그 모습에 크게 놀라며 곧, 그의 민첩한
대처에 경악하였다.
「…젠장, 검은수염… 저 덩치가 저토록 빠르게 움직일줄이야….」
「그의 배 ‘앤 여왕의 복수’ 는 알아주는 속도의 범선이지. 바람만 제대로 탄다면 이걸로는 못 따돌려.」
「빌어먹을…! 놈이 벌써 눈치를 챘을줄은…!」
「…범선까지 동원하다니…. 잡히면 목숨은 부지할 수 없겠군.」
「젠장!」
‘접선지’ 로 향하는 둘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곧장 움직이는 검은수염, 에드워드 티치의 대처에 리지와
저지는 망연자실한다. 노로 움직이는 작은 쪽배인지라 절대로 범선을 따돌릴수는 없었다. 결국 노젓는
걸 포기한 저지가 리지와 머리를 맞대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둘은 절대로 티치의 출항의도를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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