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런은 영접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칼슨’은 자연스럽게 미런의 자리에 앉으며, 노튼이 궁
지로 몰리는 이 상황을 즐기는듯 표정이 산뜻했다. 서서히 입꼬리가 올라가며 잇몸이 드러나는 그의
소름끼치는 모습에 지켜보던 해롤드는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자네 공이 크군.」
그때였다. 이 위험한 남자와 같은공간에 있는게 몹시 껄끄롭던 해롤드는 어떤 인사말로 무사히 거길
빠져나올지 고민에 잠겨있는 와중에 전혀 예상치못한 칼슨의 말을들었다. 흠칫 놀라며 시선 을 돌리
자 언제부터였는지 이미 칼슨의 눈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자네의 ‘밀고’… 아니, 고발로 불온한 싹을 잘라버릴 수 있게 ㅤㄷㅚㅆ어. 후훗… 내 오래토록 염원하였던
일이지.」
칼슨은 작게 웃음 소리까지 내며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기는 모습이였다. 그런 와중에도 칼슨, 이 계
산적인 남자는 자신의 편을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한 거래를 잊지 않는다.
「노튼이 사임되고 감옥에 갇히면… 뭐, 유배까지 시켜버리면 더 없이 좋겠지만 어찌ㅤㄷㅚㅆ든 그의 계급
에 대한 자질 부족은 머잖아 드러날 것이네. 그리되면 노튼의 자리가 공석이 되겠지.」
어느정도 밑을 깔아둔 서론뒤에 그는 비장한 눈빛으로 해롤드의 눈을 응시한다. 흔들림없는 칼슨의
차가운 푸른 눈은 노튼의 그것과 몹시 흡사하면서도 달랐다. 노튼이 자질 부족이라고는 생각 안한다.
그와 함께 여러 전투를 거치며 그의 능력이나 수완이 어떤지는 잘알고있다.
하지만 명성이란건 상대적인 존재라서 평생을 공들여 쌓아놓아도 단 한번,단 하나의 모함으로 하루
아침에 유감없이 무너지는 강하면서도 취약한 존재였다.
「‘해롤드’ 라고 했었던가, 중위?」
「예…!」
「난 자네같이 자신의 분수를 잊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네. 서로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이 나라가 멈추지 않고 진보하는 법이지. 하지만 늘 모든게 이상적 이지만은 않아. 바로
그 진보에 반하는 부류들 때문이지.」
칼슨은 어느샌가 해롤드에게 자신의 이상을 설파하고 있었다.
「그런 부류는 놀랍게도 여러 종류가 있어. 거리에 웅크리고 있는 부랑민, 사욕에 찌든 귀족, 국가의
미래따윈 생각없이 오로지 자신의 재산만 키우는데 여념이 없는 상인,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치명적인 존재는 바로…」
잠시 말꼬리를 흐리던 칼슨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띄며 해롤드를 바라본다. 그의 차가운 미소를 볼때
마다 섬칫섬칫 해롤드는 놀랐지만, 해롤드의 그런 속내따위는 아랑곳 않는듯 칼슨이 희극을 하듯 간
절하고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노튼 윌터스’ 같이 자만과 허영에 찌든 오만한 놈들이지. 놈들은 자신이 없어선 안될 큰 존재인
줄 알지. 그렇기 때문에 모든걸 자신의 기준으로, 심지어 이 나라또한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 가는줄
착각하고 있어. 그런 놈들의 주제넘은 분수, 그리고 독단이 얼마나 이 나라에 치명적인줄 아는가?」
「… ….」
그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도 없을 뿐더러, 어떻게 대답해야할지도 감을 못잡는 해롤드였다. 그러나
칼슨은 그의 대답따윈 중요치 않은듯 말을 잇는다.
「그런 놈들이 없어져야 나 같이 이 나라에 헌신하는 인재들이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게 아닌가? 안
그렇게 생각하나, 해롤드 중위?」
「아, 예…!」
칼슨은 잠시 웃더니 해롤드에게 다가섰다. 그의 창백한 얼굴이 눈앞으로 성큼성큼 가까워질수록 해
롤드는 크게 불안해하였다. 피할수도, 뒷걸음질 칠 수도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어느덧 자신의 코앞까
지 다가와 멈춰선 칼슨이 손을 들었다.
「자네도 나와 같이 이 나라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인재라고 보네.」
해롤드의 넓은 어깨에 칼슨의 창백한 손이 얹혀졌다.
「중위. 이 ‘크로헨 칼슨’ 의 뒤를 따른다면 조만간 더블린에 주둔하는 노튼의 함대장 자리는 자네에
게 돌아가게 될거야.」
「… …!」
커지는 해롤드의 두 눈이 이제껏 피하기 여념없던 칼슨의 푸른 눈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자네의 공을 제독께 상소하여 함대장의 자리에 앉혀주겠네. 어떤가?」
「가, 감사합니다!」
해롤드가 경례하며 아직 이루어지지도 않은 일에 대해 감사를 표하자 칼슨은 흡족하게 그를 지나친
다.
「시간이 많이 늦었군. 내일 아침 일찍이 다시 방문하게.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거든.」
「알겠습니다! 무엇이든 시키십시오!」
━━━━━━━━━━━━━━━━━━━━━━━━━━━━━━━━━━━━━━━━━━━━━
한줌의 온기도 없는 차가운 백사장. 끝없이 펼쳐진 그 모래밭 가운데에 모닥불 하나를 지피고 삼삼
오오 모여있는 의문의 무리가 있다. 좀더 눈여겨 살피면 하나 같이 남루한 차림에 지저분하고, 얼큰
히 술에 취한 ‘주정뱅이’ 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는 다른 이름도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해적’ 들이였다. 카리브의 두 거물인 ‘저
지’ 에단 테일러와 리지 블랙이 손을 잡았다는 소식은 어느정도 잠잠해졌으나, 여전히 그 둘의 관계
에 대해서는 꼬리와 꼬리를 무는 추론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글쌔 리지와 저지가 동침하는걸 봤다니깐!」
「이놈은 입만 열면 거짓부렁이로군! 아까는 산타메 놈들한테 들었다면서!」
「직접 본거나, 산타메 놈들한테 들은거나 그것이 그것 아닌가!」
「헛소리 집어치우고! 실은 리지 블랙의 아비인 악명높은 대해적 ‘드레이크 블랙’ 이 죽기전 저지에
게 자신의 딸을 부탁한다고 했다는군! 그래서 이제껏 저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리지를 도왔고, 그
리하여 지금의 리지 블랙이 탄생했다는 소리야!」
「…그럴사한데 말이야… 도와줄거면 그냥 도와주지, 왜 꼭 몰래 도와줘야하는거지?」
「‘말 못할 사정’ 이라는게 이럴때 쓰라고 있는것 아니냐, 이 멍청아!」
섬 전체가 그들의 집이였기에, 종종 교외로 나와 이렇게 모닥불 하나에 의지하며 럼을 마시는 무리
도 있었다. 하지만 섬 사방에 흩어져있는 해적들이 술기운 속에서 꺼내는 말은 매한가지. 저지와 리
지의 관계에 대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소문들 뿐이였다.
━
「제기랄!」
하지만 교내만큼 인파가 많은 곳은 없었다. 나소의 이들은 깊은 밤부터가 활동의 시작이였다. 상당
히 늦은 시간임에도 그들은 졸린 기색없이 럼을 마시며 욕을 하고, 싸움을 벌이며 총포를 쏘는등 나
소의 밤을 더욱 요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런 소란 속에서 한 여인이 낡은 주점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또 어디서 시비가 붙은 모양이로군… 리지.」
「입닥쳐.」
반쯤 풀린 눈으로 식탁에 두 다리를 꼬아 올린 저지의 물음에 리지는 눈길도 안주고 반론한다. 그녀
의 냉람한 반응이 재밌는듯, 혹은 취기가 얼큰히 오른 까닭 인듯 저지는 조용히 웃으며 그녀가 이번
에는 어떤 거친 해적의 뺨을 후리고 왔는지 감히 상상이나 해본다.
「… ….」
그때였다. 주점에 들어서자 마자 자리 하나를 잡고 럼잔에 술을 따르던 리지의 예리한 눈매가 어둠
속의 저지에게로 향한다. 문득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저지에게로향했다. 성큼성큼 떼어
지는 리지의 발걸음을 의식한 것일까, 저지의 시선이 다가오는 그녀를 향했다.
「모든게 다 네놈 때문이야.」
「… …?」
리지가 식탁 위에 올려져있는 저지의 두다리를 발로 밀쳐낸다. 다리가 털썩 땅으로 떨어지자 자리에
주저앉듯 무너진 저지는 놀란 표정을 뒤로하고 다시 너스레 웃으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취한 모습이였다.
「왜 그러신가, 리지 블랙양?」
「네놈이 더 잘알텐데? 바깥의 멍청이들이 너와 나에 대해서 어떤 헛소리를 늘어놓는지 말이야!」
아무리 취했어도 저지 또한 모를리 없는 일이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으나 다시금 저지가 웃음을 흘
리기 시작했다.
「…크흐흐… 그것 때문에 그리 곯이 난건가?」
「‘그것’ 때문에? 술에 쩔어 주제 파악을 못하는군, 에단. 죽고 싶어?」
「하하, 미안하게 ㅤㄷㅚㅆ군. 허나… 나도 피해자라면 피해자란 사실을 잊지 말아줬으면 고맙겠군, 리지.」
「뭐? 어째서 네놈이 ‘피해자’ 지? 나와 엮인게 네놈에겐 큰 영광아냐? 대해적 ‘드레이크 블랙’ 의 외
동 딸인 나 ‘리지 블랙’ 의 연…」
순간 리지가 말을 멈췄다. 저지는 즐기듯,
「연…? 연 뭐?」
하고 능청스럽게 묻자 리지는 저지 앞의 식탁을 밀쳐차 넘어뜨린 뒤 훽하니 몸을 돌렸다. 이제 서른
둘인 꽃다운 청춘인 그녀를 원하는 이는 많았으나, 그녀의 강경함과 배포 때문에 누구 하나 감히 시
도나 엄두조차 못내는 것이였다.
그런 리지를 이처럼 대담하게 대하는건 이 속을 알 수 없는 남자, 저지 ‘에단 테일러’ 뿐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