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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웅은 없다  #프롤로그

AnthoNyD
조회: 760
2010-06-26 13:57:50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소집원장의 물음에 여인이 대답했다.

"그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약자들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소산이며 단 한번도 현실을 대면해본 적 없는 겁쟁이들의 망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웅은 태어나는 것도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시대가 만들어내는 단 하나의 긍정적 변수도 아닙니다."

거기까지 말한 여인은 잠시 말을 끊은 뒤, 이어 말했다.

"영웅은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뒤엎을 수 있는 구원자가 아닙니다. 영웅은 이미 제시된 결과 속에서 창조되는 정신적 지주일 뿐입니다."
"……."
"영웅은 없습니다."

여인의 주장이 끝나자 소집원장은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듯이 올려놓았다. 그녀에게 대답을 들은 소집원장의 눈동자엔 불신감이 한층 더 팽배해져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여인의 두 눈동자에서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됐든 못마땅한 건 사실이다. 소집원장은 다리를 꼬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무릎 위에 깍지 낀 양손을 올려놓으며 화제를 잠시 바꾸기로 했다.

"레이첼씨, 당신은 매사에 그렇게 부정적이십니까?"

레이첼이라 불린 여인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그건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적막이 흘렀다.
기다리던 소집원장은 곧 만사 귀찮다는 듯이 뒷머리를 난폭하게 긁으며, 책상 위에 둔 서류를 다시 집어들었다. 그녀와 면담한지는 벌써 반시간 째였고, 그 결과 마침내 소집원장은 깨달았다. 그녀가 단번에 대답하지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을 몇번이나 재촉해 본들 결코 그녀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그런 태도를 포함해 소집원장이 그녀에게 느낀 꺼림칙한 부분은 꽤나 많았지만, 그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변할 수 없었다. 지금처럼 긴급한 시국에 사적인 감정의 개입으로 공적인 이득을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출전 명령은 3일 뒤입니다. 그때까지 충분히 쉬어두십쇼."

레이첼은 대답 대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군에 들어온지는 벌써 이틀째가 되었지만 레이첼은 여전히 급식 제공의 시간대를 제외하곤 막사를 벗어나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햇볕이 불모지 위를 훅훅 달구는 오후엔 그녀 혼자 뿐인 막사 안에서 조용히 책을 읽었고, 해가 지면 그즉시 침대에 거머리처럼 붙어 해가 뜨는 다음날까지 한치 미동 없이 있곤 했다. 되도록 체력을 비축해 두려는 일종의 조치였다.
레이첼은 막사의 창문 대용으로 쓰이는 작은 천막을 걷어올려 밖을 보았다. 분주히 돌아다니는 장교들이나 병사들 사이로 무구들이 햇빛에 희번뜩이고 있었다. 레이첼은 별 감흥 없이 천막을 도로 내린 뒤 읽고 있던 책을 침대맡에 두었다.
뭔가를 생각하듯 초점 없는 눈동자로 책의 붉은 갈피끈을 몇 번이나 매만지던 그녀의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행동이 서서히 멈춰갔다. 피로감이 아닌 오후의 늘어지는 햇살이 그녀를 나른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는 스르르 감기었다. 그렇게 어둠 밑을 향해 한없이 추락했다.
꿈 속에서, 그 어둠 속에서 오늘도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다.

터져나오는 한줄기의 섬광처럼, 혹은 굶주린 짐승의 서늘한 안광처럼 그것은 빛났다.
정체된 공기를 가로지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가열시키는 한 쌍의 칼날. 자취엔 붉은 선혈만이 즐비했고 사체들의 비명소리는 천지에 진동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대적자를 앞두고 모든 자들을 멸살시킨 아버지의 우람한 등마저도, 그 대적자 앞에선 너무나도 작아보였다. 너무나도 약해보였다.
소녀는 끝끝내, 예견된 결과 앞에서 스스로 그 파멸을 향해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아버지를 멈춰세우지 못 했다. 그를 부르긴 커녕 숨소리 조차 입 밖에 내지 못 했다. 그저 사방이 빙벽으로 둘러싸인 혹한의 동굴 속에서 소녀가 할 수 있는 건 엄습하는 오한과 잠식하는 공포 속에 불가항력적으로 무릎을 꿇는 일 뿐이었다. 그것만이 전부였다.
결국 외마디 비명소리가 울러퍼지고, 피로 뒤범벅이 된 채 짝을 잃어버린 검 한 자루가 얼음바닥을 미끄러져 소녀의 앞에 이르렀다. 급기야 그 불길한 예지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녀는 일어서지 못 했다. 도망치지 못 했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 하는 건 아니었고 그 위험을 인지하지 못 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몸도 마음도 얼어붙어버린 그 때에, 소녀는 최후의 대적자를 앞에 둔 채로 싸늘하게 빛나는 검 한 자루를 집어들었다.

복수가 아닌, 생존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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