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으로 남을 누르고 자신을 정당화 시키려고 하니까 나쁜놈이 맞죠.
결과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식?
왜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아버지 가로쉬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악마에게 혼을 팔은 변절자'였던 시절엔 기죽어 살았죠
그러나 그 악마를 때려잡고 호드의 명예를 되살렸다는 스랄의 전언에 단숨에 기를 회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악마에게 혼을 팔았어도 나중에 그 악마를 때려잡았으니까 영웅이야!'
라는 식의 가치관이 자리잡게 된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잘못을 했어도 적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면 만회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이런 사고방식이 리더가 되어서는 '내정에서 발생하는 빵꾸는 전쟁으로 만회된다'는 방식으로 발전했겠죠.
결과 지상주의가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강자가 옳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도 대체로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하죠.
여기서 곁다리를 하나 파자면, 제작 준비 중에 드군의 의미는 왜 이런 파시즘이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탐구하는 데 있었다고 봅니다. 위에 언급한데로 가로쉬는 아버지의 공백에 무기력감을 느꼈고, 아버지의 이야기가 채워지자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상당한 파더콤플렉스가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나그란드 통구이 전에 가로쉬는 스랄에게 말합니다. '넌 날 내버려 뒀다' 이거 상당히 원망 섞인 목소리였는데요. 왠지 본인이 어릴 때 '허약하다'는 이유로 자길 버리고 간 아버지 그롬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가로쉬는 스랄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자리를 채워주길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는 대지고리회로 떠나버렸고, 그 상실감은 엄청 컸죠. 그래서 본래 자신이 꿈꾸던 아버지 '결과가 모든 걸 만회회 준다'로 급선회했다고 봅니다.
그럼 과거의 드레노어로 가서 다른 세계의 그롬을 대면하는 과정에서 가로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어릴 적엔 원망했고, 떠난 후엔 그리워하다가 나중에는 마음 속 영웅으로 자리했던 그롬의 '실존'을 경험하고 난 뒤 가로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본인의 파시즘이 아버지 결핍에 의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후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드군의 계획의도였다고 봅니다.
소설 전쟁범죄에서 천신들이 말했던 가능성이란 그런 의미였겠죠. 뭐 결과적으론 다 말아먹고 '드레노어는 자유다'가 되어버렸지만.
제가 왜 이런 뇌피셜을 쓰냐면, 지금 군단에서 일리단의 과거 세탁이 드군에서 가로쉬를 상대로 풀어내지 못한 부분을 재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일리단의 결핍은 티란데에 대한 애정과 형 말퓨에 대한 열등감이죠. 가로쉬의 아버지 결핍을 여기에 대입한 것 같아요. 원래 계획대로 풀렸다면 가로쉬에게도 일리단 과거세탁과 같은 과거 회상 에피소드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죄는 죄지만 그 상황에 빠지면 너도 죄를 저질렀을 거다' '인간의 결핍은 누구나 폭력을 선택하게 만든다'는 식의 주제를 던졌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달의 수행사제들을 제 손으로 죽여놓고도 결과적으로 아제로스를 구했다며 당당한 일리단의 모습에서 가로쉬를 느꼈어요. 드군 오픈 전 공개된 단편 소설에서는 그롬도 자기 부인을 잃은 결핍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죠.
드군의 이야기는 판다리아에서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심지어 중간에 '전쟁범죄'라는 테마까지 얹혀있었기 떄문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같은 이야기도 다루고 싶었을거라 생각해요.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사회에 복종하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이렇게 예상해봐도 가로쉬는 어차피 죽긴 죽었을 것 같고요, 대신 그롬이 외치는 '드레노어는 이제 자유다'가 헛소리가 아닌 진짜 결핍과 무조건적이 복종을 극복한 이들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되었을 것 같아요. 그럼 명작이 또 하나 나왔겠죠. 물론 그건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되었지만요.(애도)
그런데 저도 알고 여러분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만, 가로쉬랑 일리단은 상황이 많이 다르죠? 그래서 군단의 일리단 스토리가 개판이 되고 있다고 봅니다.
군단의 일리단과 연결시켰던 부분을 이어보자면 수라마르 스토리가 배경으로 깔리고 있다는 걸 의식하게 되는데요. 수라마르에는 군단의 지배에 협조하며 합리화 시키는 인간들 있죠? 일단 지도자인 엘리산드부터가 캐릭터 설명을 보니 수라마르 멸망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하고 있더군요. 아마 밤의 요새 스토리에선 군단의 지배를 받으면서까지 밤샘을 잃기 싫어했던 '결핍'과 '욕망'이 본인을 그러한 타락으로 이끌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겁니다. 수라마르를 지킨다는 건 자기합리화일 뿐이고요.
그리고 그 스토리와 투트랙으로 일리단은 아마 빛의 용사가 되는 이야기가 깔리는 겁니다. 수습이 쉽진 않겠지만 블자는 드군 때 못했던 이야기를 꼭 풀어내고 싶은 것 같아요. 일리단은 본인의 결핍을 극복해서 빛의 용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어쩌면 결론에 이르러서 자신의 선택 중 몇몇에 대해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지도 모릅니다. 더 나아가면 빛의 용사가 된 상태에서 '자기희생을 위한 산화'를 할지도 모르겠어요. (미안 티란데, 미안해 형.. 뭐 이런 대사를 하면서)(이럼 진짜 '어서가 짐'이란 비슷해지네요;;;)
과거에 받았던 배제와 외로움. 이것을 직면하지 못하고 만들어낸 비뚤어진 자아가 가로쉬(일리단)을 악인으로 만들었고, 와우의 스토리는 그것을 극복하는 결과(가로쉬는 그롬을 회복시킴, 일리단은 빛의 용사)로 이끌어질(혹은 그랬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쁜놈이 왜 나쁜놈이 되었나를 살펴보고 그걸 어떻게 극복하는지 까지를 다루는 게 드군과 군단에서의 테마 아닐까요.
그럼 이만 망글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