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워크래프트3에서 시작된 아서스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막을 내린지도 햇수로만 7년이 지났습니다. 파시즘과 인종차별주의, 군국주의 등 20세기에 벌어진 온갖 인류의 우행들을, 비록 가상의 세계일지언정 21세기에 또다시 저지르고만 희대의 전쟁광 가로쉬 헬스크림은 3년전,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각성하게 된 바로 그 언덕에서 명을 달리하고 말죠. 일만년의 동정을 자랑하는 우리의 순정남 일리단은 장사한지 10년 만에 굴단 앞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일리단의 부활을 기폭제로 국적을 불문한 와우의 커뮤니티들은 온갖 등장인물들의 추종자들이 합종연횡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옹호하고, 때로는 다른 캐릭터들을 깎아내리기도 하는 등 마치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을 방불케 했습니다. 당장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우 인벤의 역사 게시판에서도 일리단과 아서스를 비교하는 글이라든지, 가로쉬의 범죄의 경중을 논하는 글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죠.
애초에 일방적인 빠심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데다가 시간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같은 참가자가 계속해서 참여하는 것도 아니어서 같은 내용이 돌림노래처럼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설전이기에 와우가 서비스 종료하는 그날까지 끝이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병림픽에 지친 몇몇 와우저들은 '현실 세계도 아닌데 뭘 그리 열을 내고 그러시나' 등의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그러면 일종의 집단적인 현자 타임이 게시판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거품을 물고 떠들고 있는 걸까요?
1. 본래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일리단과 아서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애초에 워크래프트 시절에는 끝까지 라이벌로 묘사되던 둘이었던데다가 비슷한 일대기를 겪기도 했던 만큼 둘을 붙여놓고 비교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떡밥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제가 본 토론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죠. 아서스나 일리단이나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위해-아서스의 경우는 로데론 백성들이었고 일리단의 경우는 아제로스를 지키는 것...인가요?-일부분을 희생했을 뿐인데, 왜 일리단은 그 행위가 스토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에게 정당화 되는 것이냐. 그리고 댓글창은 서로를 힐난하는 일리다리들과 스컬지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분탕질하는 코르크론들로 난리가 났죠.
인류의 역사를 살펴봤을때. 보편적으로 '살인'은 당연히 '사형'이라는 죗값을 수반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도 '살인은 당연히 사형아님ㅋ?'라는 이유로 법전에 적지도 않았었죠. 그런데 일리단과 아서스의 행동은 명백히 '살인', 그것도 의도적인 집단살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옹호를 받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살인을 정당화하는 걸까요?
이들의 주장의 기저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짧은 한 문장으로 대표되는 '공리주의'라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이제는 뭐 공리주의라고 거창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멋쩍을정도로 널리 퍼져있는 사상이죠. 현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죠. 다수결로 해결하자!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 이런 말들, 많이들 들어 보셨죠?
이에 대해 제가 좋아하는 한 환상 문학의 등장인물의 대사로 반박을 해보려 합니다.
_"열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열 명의 살인자를 만드는 일이지."_
각 등장인물들의 상황을 분석해서 이 비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죠.
아서스의 경우 안돌할에서부터 널리 퍼진 역병 곡물이 스트라솔름에도 도착, 이미 대다수의 도시 사람들이 곡물을 배급받은 상황이었습니다. 역병의 전염성과 그 증상에 대해서는 켈투자드를 쫓으면서 목격했던 참상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은 아서스는 스트라솔름을 '정화'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립니다.
메디브의 말을 따라 고 웨스트 하지 그랬냐는 비판은 일단 접어둡시다. 사이비 땡중 말을 듣고 지엄한 나랏일을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평범하게 아서스의 행위의 정당성에 비판을 하자면 간단하게 두 가지 정도가 있을겁니다. 첫째는 정말로 스트라솔름을 희생해서 얻는 이익이 그 희생보다 더 크냐는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이미 포세이큰이나 다른 마법사들의 연구를 통해 역병에 대한 연구가 거의 끝난 요새와는 달리 아서스가 언데드와 마주했을 때는 역병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이 역병에 감염된 사람은 불사의 괴물이 된다는 것과 역병에 감염된 곡물을 통해 전파된다는 것 정도였죠. 거기다가 이미 스트라솔름 이외의 다른 도시들로 역병이 퍼져나갔을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상황이었습니다. 스트라솔름과 같은 학살이 다른 곳에서 또다시 몇 번이고 반복되어야 할지도 몰랐다는 거죠. 이때 사회 전체에 퍼져나가는 불안감은 어쩌죠? 잠재적 감염자 역시 무조건 사형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옆동네 사람들이 로데론 정규군을 만나면 어떻게 대꾸할까요? 어서 오셔서 우리들을 정화해주시고, 위대한 나라 로데론을 지켜주세요? 당장 쟁기들고 풋맨 머리통을 찍어버리지 않으면 양반이지 않았을까요? 좀더 소극적인 대응이라면 마을을 버리고 어딘가로 멀리 내뺐을지도 모르지요. 역병을 보유한 채로 말이죠.
둘째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반박 정도가 될 겁니다. '스트라솔름을 정화하는 것이 알고보니까 더 손해더라'라는 반박이 아니라, 스트라솔름의 시민들이 아무리 역병에 감염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침해되지 말아야할 그 어떤 무언가가 있다는 내용의 비판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다른 방법이 있을 걸세"라는 우서의 말은 이쪽 논리가 더 강하게 드러나죠. "자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 뿐일세."라는 아서스의 말을 들으며 죽어간 스트라솔름 시민에게 감정이입 하게 되면 두번째 반박쪽에 더 손을 들어주게 될 겁니다.
일리단의 행위 역시 비슷한 논리로 비판할 수 있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차피 수라마르가 함락되지 않는다고 해서 아제로스 연합군이 군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한한 물량의 군단 앞에서 아제로스 어벤저스들은 '백도어로 차원문을 닫는다'라는 선택지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수라마르에서의 승리와 패배는 결국 전세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국지적인 교전에 불과했다는 거죠. 여기에서 승리했다고 쳐도, 달빛사제들이 컨슘 당했다는 소식에 나이트엘프 사회에 일리단과 레이븐크레스트에 대한 불신감이 널리 퍼져 달빛사제 지원율이 급감하면 어쩌죠? 또한 살인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행위인 우리 사회처럼, 전쟁이 일상화되어 있는 워크래프트의 세계에서도 팀킬은 결코 용납될 수 없나봅니다. 레이븐크레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이, 심지어 적인 군단의 악마들도 일리단의 행위에 혀를 내두르죠. 마지막으로, 일리단은 애초에 목적 자체가 불순했잖아요? 수라마르와 사랑하는 티란데를 위해서라니, 어디에 방점이 찍혀있을지는 뻔하죠.
자, 그러면 이제는 반격의 시간입니다. 첫번째 반박에 대해 다시 한 번 반박을 해보죠. 아이러니하게도 첫번째 반박은 본인이 비판했던 주장과 동일한 논리적 근거, 즉 공리주의적 판단을 기저에 깔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이들에게 이익으로 작용했을 것이다'라는 건데, 이건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고 결과론적인 해석이잖아요? 아서스와 일리단의 행위가 갓갓갓갓갓이었을 가능성은 무시한 반박인거죠. 두번째 반박에 대한 반박은 어떨까요? 한 목숨에게는 딱 한 목숨 분의 권리만 부여되며 목숨들간에 우열은 없으므로, 합산해서 이익이 더 큰 쪽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박은 어떨까요? 사실 이러한 판단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너무나도 흔히 하는 것들입니다. 만약에 한 명을 희생해서 열 명을 살릴 수 있다면-희생방법, 목적은 불문하고-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숫자가 너무 적다면 1억명으로 늘려도 상관없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어차피 같은 논리니까요.
자, 여러분은 지금까지 일리단과 아서스를 통해 '공리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주로 어떤 비판을 받고 있는지를 겉핧기 식으로라도 알아보셨습니다. 물론 더 자세한 내용은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 등의 공리주의 철학자들의 저술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되지만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가공의 캐릭터들 가지고 둘 다 잘하는 짓이다'라는 비판과 함께 날아올 어머니의 등짝 스매시, 혹은 주변 사람들의 히익 오타쿠라는 반응에 맞서 합당한 핑계를 댈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사실 여러분이 일리단과 아서스를 가지고 하고 있는 것들은, 단지 수준이...조금...아니, 많이 다를 뿐이죠.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보다 정교하게 갈고 닦기 위해 해왔던 것들입니다. 극단적이고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여 자신의 사유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는 행위, 흔히들 '사고실험'이라고 하죠. 슈뢰딩거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최소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들어보신 분 많으시겠죠? 라이트노벨 같은 데서 '라플라스의 악마' 같은 어둠의 다크가 느껴지는 이름도 들어보셨을 거구요. 무한도전에서도 '죄수의 딜레마'라는 사고실험을 기반으로 <도둑들> 특집을 찍기도 했죠.
사실 사고실험은 판타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사고실험을 예로 들어볼까요?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가 제시한 가상의 존재인 라플라스의 악마는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 수 있고 계산할 수 있어,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것은 물론 미래의 일까지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다고 하는 악마입니다. 왠지 싸구려 판타지 소설에 나올 법한 등장인물 같은 설정 아닌가요?
이 사고실험은 그냥 쓸데없이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유를 현실세계에 적용하기 전의 일종의 생각훈련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천 수만번 어떤 특정한 상황에 놓이게 되고,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그리고 선택을 통해 발생한 기회비용을 떠올리며 매일 밤 이불을 차죠. 그리고 다음에는 기회비용을 기필코 줄이고야 말리라고 다짐을 합니다. 사고실험은 이런 우리의 다짐에 도움을 주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특정 상황을 가정하고 그에 대한 판단을 '연습'하게 하는거죠. 판타지는 그 사고실험에 설정을 덧붙이고, 스토리를 짜맞추는 겁니다. 더 재밌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말이죠.
3. 우리는 우리가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 이 시간이 쓸데없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의 역게 키배질은 당신의 삶을 보다 바람직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네 가지 뿐입니다. VS 놀이는 그만하자는 마음가짐, 모르면 찾아보자는 지식탐구의 태도, 내가 하고 있는게 맞는 말인지 메타인지해보는 자아비판, 그리고 떠들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마우스 클릭질입니다.
왜 떠드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떠들 가치가 있는가가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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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고를 거치지 않고 복붙했더니 글이 짤린 부분이 있었네요;;;;